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 9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레오 9세는 전통적인 도덕상을 내세우며 가톨릭 개혁을 착수했다. 교황은 1049년 [[주님 부활 대축일]]에 소집된 시노드에서 성직자들의 혼인과 성직 매매를 반대하는 확고한 신념을 관철시켰다. 이듬해 1050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소집된 시노드에서는 [[미사|성체성사]] 교리를 잘못 가르친 [[프랑스 왕국]]의 신학자 베렌가리우스의 주장을 단죄하는 문제를 다뤘다. 제3차 주님 부활 대축일 시노드에서는 성직 매매로 주교가 된 이들에 의해 사제품을 받은 사람들을 재서임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. 레오 9세는 당시 [[동로마 제국]]의 [[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|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]]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로부터 서신 하나를 받았는데, 서신에는 서방 교회가 [[효모]]를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한다는 것과 단식일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. 미카엘 총대주교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교황은 총대주교에게 <콘스탄티누스의 기증''{{{-1 (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)}}}''>[*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된 [[동로마 제국]]의 황제 [[콘스탄티누스 1세]]가 교황 [[실베스테르 1세]]에게 쓴 것으로 알려진 위조 칙서다.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[[콘스탄티노폴리스]]로 천도하면서 로마와 제국의 서방 영토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, 대신 자신은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. 이 조작된 칙서는 중세 시대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.]은 위조된 것이 아닌 실제로 [[콘스탄티누스 1세]]가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[[베드로]]의 정통 후계자인 로마의 교황만이 전체 교회의 최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보냈다. 이렇게 동방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와 갈등을 빚은 교황은 선종하기 전에 실바칸디다의 훔베르트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임명한 후 동로마 제국으로 파견했다. 훔베르트 추기경은 총대주교를 파문한다는 칙서를 동방 교회 측에 전달했고,[* 당시 그가 동방 교회 측에 칙서를 전달했을 때 레오 9세는 이미 선종한 후였고, 교황의 특별한 지시 없이 단독적으로 행동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 교회법적으로 무효였다.] 이에 반발한 미카엘 총대주교가 훔베르트 추기경을 포함한 교황 특사 수행원들을 파문하는 칙서를 공표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. '''그렇게 1054년 [[동서 대분열|동서 교회의 분열]]이 시작되었다.''' 그 외에도 남이탈리아로 온 노르만 원정대에게 맞서기 위해 (남이탈리아에 교황 장원이 많았다) 친정했는데, 사로잡혔지만 (노르만은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라서) 융숭하게 대접받았다. 여기서 힘을 키운 노르만족은 십자군 때 예루살렘도 가고 콘스탄티노플도 털고 했다. [[분류:1002년 출생]][[분류:1054년 사망]][[분류:오랭 출신 인물]][[분류:신성 로마 제국의 인물]][[분류:독일의 귀족]][[분류:독일인 교황]][[분류:시성된 교황]][[분류:가톨릭 성인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